갑작스럽게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의 몸은 자동으로 반응을 준비한다. 흔히 말하는 '전투-도피 반응(fight or flight response)'이 그것이다. 이 반응은 우리 몸이 생존을 위해 위협에 대처하도록 설계된 본능적인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뒤에서 공격해 온다면, 우리의 뇌는 아주 빠르게 그 상황을 분석하고 반응한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혈압이 오르며, 근육이 긴장해진다. 이러한 변화들은 모두 몸이 싸우거나 도망칠 준비를 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이 두 가지 반응 대신, 그저 멍하게 서 있는 사람도 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전투-도피 반응은 주로 뇌의 편도체가 활성화되어 작동한다. 편도체는 위험을 감지하고, 이를 즉각적으로 신체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위험을 감지하면, 몸은 아드레날린을 분비해 긴급한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때로는 위험을 앞에 두고도 도망치거나 싸우지 않고,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이걸 '동결 반응(freeze response)'이라고 한다.
동결 반응은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터득한 또 다른 방어 메커니즘이다. 아주 오래전, 우리 조상들이 숲 속에서 포식자를 마주쳤을 때, 싸우거나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는 움직이지 않고 숨을 죽이며 포식자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의 생존 전략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 본능이 현대 사회에서도 위기 상황에서 '멍해지는'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뇌에서 이 동결 반응을 유도하는 것은 주로 미주신경이다. 이 신경은 자율신경계의 일부로, 몸을 진정시키고 에너지를 절약하도록 돕는다. 즉, 싸움이나 도망이 아닌 '움직이지 않고 숨죽이기'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몸이 싸우거나 도망갈 수 없다고 판단하면, 에너지를 최소화하고 그 상황에서 최대한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 동결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멍해지거나, 심지어는 기억이 희미해지기도 한다.
참고로 높은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동결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이는 위협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적 압박에서도 나타나는 생존 메커니즘이다. 높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뇌는 그것을 일종의 위협으로 인식하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 에너지를 최소화하며 스스로를 보호하려 한다.
예를 들어, 압도적인 업무량이나 극도의 불안감을 느낄 때, 사람들은 멍해지거나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몸이 그 순간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 일종의 '정지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다. 뇌는 생존을 위해 감정을 마비시키고 신체적 반응을 최소화하여, 그 상황에서 심리적, 신체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려 한다.
또한, 번아웃 상태에서도 기억력이 저하될 수 있다. 번아웃은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누적된 상태로, 이로 인해 뇌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장기적으로 많이 분비되면 뇌의 중요한 부분인 해마에 영향을 미쳐서 기억력과 집중력이 저하될 수 있다. 해마는 기억을 형성하고 저장하는 역할을 하는데, 스트레스가 길어지면 이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어, 일상적인 일들을 쉽게 잊어버리거나 기억이 흐릿해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동결 반응은 단순한 신체적 위협뿐 아니라 정신적 위협에도 적용되는 생존 전략이다. 우리 몸은 생존을 위해 최적의 방어 방식을 선택하는데, 싸움도 도망도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는 그저 멈추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높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로 작용하며, 그 순간을 지나치기 위해 우리 스스로를 일시적으로 '끄는' 반응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동결 반응은 때로 우리의 본능적인 생존 메커니즘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험장에서 문제를 보고 머리가 하얘지거나,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 바로 이러한 동결 반응의 예이다. 하지만 이 반응이 결코 '나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우리 몸이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작동하는 본능적인 방어 반응이다.
다음번에 위기 상황에서 멍해진다면, 그것은 우리 뇌가 싸움과 도망 외에도 또 다른 생존 전략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뇌는 그 순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의 반응을 조금 더 받아들이고, 필요 이상으로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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