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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글

[단편 소설] 세 마리의 개

by 세납장 2024.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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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룽... 쾅!!’

레오는 깜짝 놀라 귀를 쫑긋 세웠다. 거센 천둥소리가 집을 뒤흔들며 지나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어둠이 깔린 창밖은 번개가 칠 때마다 하얗게 일렁였다. 레오는 창문 너머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제야 소파 옆 구석에 자리를 잡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몇 해가 지났지만 천둥소리는 여전히 레오에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창문으로 아빠가 오나 살피던 치즈와 모카도 이내 레오 옆에 자리를 잡았다.


"정말 지독한 비야," 모카는 엎드려 발을 포개며, 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난 비 오는 날 좋던데! 아빠가 까까를 주잖아!" 치즈는 혀로 코를 핥으며 킥킥 웃었다.

"아빠는 언제 오는 걸까?" 모카는 창문 너머로 머리를 돌리며 중얼 거렸다.

"요즘 자주 늦긴 했어. 우리 밥을 잊은 건 아니겠지? 배고프다." 치즈는 한숨을 쉬며 하품을 하였다. 
 

모카는 치즈와 레오를 보더니 현관문으로 가 바닥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지금이면 벌써 아빠가 돌아와 밥을 먹고, TV를 보는 아빠 옆에서 배를 까고 누워 있을 시간이었다. 치즈는 입맛을 다시며 빈 그릇을 삭- 삭- 핥았다. 그리곤 주방 아일랜드에 앞발을 올려 이리저리 살폈다.


"아빠가 두고 간 간식이 있을 텐데..."

레오는 일어나 천천히 치즈에게 다가갔다.

"사고 치지 마. 저번에 혼나고 아직도 그래?" 레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지만 배고픈걸," 치즈는 입을 삐쭉 거렸다.

"조금만 있으면 아빠가 올 거야." 레오는 몸을 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사고 치면 정말 많이 혼날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세 마리는 거실 카펫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빗소리는 더 거세어지며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집안의 공기는 무겁고 차가웠다.

레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치즈와 모카가 집에 오기 전 혼자 있을 때가 문득 생각났다. 치즈와 모카가 사고를 자주 쳐 매번 자신까지 아빠에게 혼이 나지만 이런 비 오는 날에는 혼자보다는 같이 있는 게 낫다고 느껴졌다.


‘쾅!!!!’


깜짝 놀란 모카는 후다닥 이글루 모양의 개집으로 도망갔다.  집 전체가 울릴 만큼 큰 천둥이 쳤다. 
모카는 얼굴만 빼꼼 내밀고 두려운 눈빛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집이 무너지진 않겠지?" 모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레오는 코웃음을 치며 "그럴 리가"라고 답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 이곳저곳의 냄새를 맡았다. 

치즈는 그런 레오와 모카가 웃기다는 듯 킥킥댔다.

"너흰 정말 겁쟁이야. 이건 그냥 밖에서 나는 소리야! 우리랑 아무 관계없다고."


모카는 여전히 얼굴만 내민 채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잠잠해져 조심히 집 밖으로 나왔다.

치즈는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길게 하고는 카펫에 자리를 잡고 엎드려 누웠다.  모카는 치즈의 머리에 냄새를 킁킁 맡더니 옆에 나란히 누웠다.


"아빠 올 때까지 우리 재밌는 놀이 하자!" 모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치즈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치즈는 "무슨 놀이?" 하고 물으며 코를 핥았다.

"시간 때우기에는 뒷담화지!" 모카는 여전히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레오는 집 구석구석 냄새를 다 맡은 후, 치즈와 모카에게 다가와 옆에 같이 엎드리며 말했다.
 
"아빠가 너무 늦어."

"지금 아빠 욕한 거야!?" 모카는 신이 난 듯 꼬리를 더 세차게 흔들었다.

"아빠는 밥을 너무 조금 줘." 치즈는 쩝쩝거리며 말했다.

모카는 다시 엎드리며 치즈에게 말했다. "그건 네가 너무 똥을 많이 싸서 그렇잖아."

치즈는 길에 보이는 족족 입에 넣곤 했다. 
 
"세상에 맛있는 게 너무 많은걸." 치즈는 눈을 감으며 세상에 맛있는 것들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가끔 아빠가 주는 구충제 약도 레오와 모카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치즈는 맛있게 먹곤 했다.  아빠 몰래 식탁 밑으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도 치즈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신이 나 떠들던 그들의 이야기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배는 계속해서 고팠고, 빗소리는 집안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물은 이미 바닥을 보인 지 오래였다. 시간은 며칠째 흐르고, 집안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의 밤이 흘렀고, 개들은 몇 번이고 창문을 내다보았지만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빗소리는 그칠 줄 몰랐고, 집 안은 점점 더 음산해져 갔다.


가장 나이가 많은 레오는 지쳐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나 잠깐만 눈 좀 붙일게... 아빠 오면 깨워줘."

치즈와 모카는 엎드린 채 레오를 보며 눈을 꿈뻑거렸다. 레오를 깨우고 싶었지만, 말할 힘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좀 흐른 뒤, 치즈는 천천히 일어나 잠이 든 레오에게 다가갔다. 레오의 얼굴과 귀에 코를 대고 냄새를 킁킁 맡더니 한동안 말 없이 바라보았다. 치즈는 왠지 모르게 자꾸 눈이 감겼고 레오 옆으로 가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이미 차가워진 레오 옆에 작은 온기라도 느끼고 싶은 듯 바짝 붙어 누웠다.


모카는 그런 치즈를 보다가 조용히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모카는 아빠가 얼른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문 앞에 엎드린 채 귀를 쫑긋 세웠다. 몇 번이고 문이 열릴 것만 같아 몸을 일으켰지만, 현실은 잔혹하게도 조용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을까 철컥 하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모카는 놀란 채 고개를 들었다. 아빠는 문을 열고 들어와 웃으며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모카는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아빠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 순간, 정말로 문이 열렸다.

두 명의 낯선 이들이 비에 젖은 채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죽어 있는 개들을 내려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집 주인이 며칠 전 비 오는 날 교통사고로 사망했대. 집에 아무도 없어서 굶어 죽었나 보네." 한 사람이 말했다.

모카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아빠가 돌아왔다고 믿으며, 기쁨에 차서 꼬리를 흔들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빗소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창문을 두드리며 마지막 남은 조용한 시간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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