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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글

[단편 소설] 택배

by 세납장 2024.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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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섭게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내 입김에 맞춰 창문에는 작은 서리가 생기다 사라졌다.

크리스마스이브가 얼마 남지 않아 밖에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손에 짐을 잔뜩 든 채 지나다녔다. 나는 한참 그들을 바라보다 누가 볼까 봐 얼른 불을 끄고 다시 창가에 섰다.

하늘은 여전히 굵은 눈이 끊임없이 내렸다.


한참을 서 있다 손을 가만히 창가에 대어보았다. 차가운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손을 떼니 손자국이 창문에 있다가 곧 사라졌다.

암막 커튼을 치고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완전한 어둠이었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눈을 몇 번 끔벅 거리다 감고 잠들기를 간절히 바랐다. 싸늘한 공기에 이불을 덮고 손바닥을 서로 마주 잡았다. 포개진 손들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끼며 잠에 빠져 들어감을 느꼈다.


부우웅-


진동 소리에 잠을 깼다.
아버지 전화가 부재중으로 찍혀 있었다.
진동이 한 번 더 울렸다.

‘잘 지내지? 어제 네가 죽어서 유품을 정리하라는 연락을 받는 꿈을 꾸었어. 걱정돼서 연락했다.’

나는 머뭇거리다 ‘괜찮아요’를 보낸 후, 휴대폰을 끄고 다시 눈을 감았다.
 

딩동-
 

갑자기 집 초인종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가 찾아왔을지 의아해하면서도 문을 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벨 소리는 끊임없이 울려대며 신경을 긁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문을 열어보니, 문 앞에는 낯선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도 없고, 상자에는 단지 이름과 주소만 적혀 있었다. 나는 상자를 방 안으로 들여와 열어보았다.

택배를 열어보니 시계가 들어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손목시계였다. 특이한 건 그 시계에 시곗바늘이 없었다.
나는 시계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상자 안에 있는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에는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만 적혀 있었다. 발신자의 이름도 없고, 다른 메시지도 없었다.

나는 시계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별 의미 없다는 듯이 다시 택배 상자에 넣었다. 상자는 방 한구석에 대충 밀어둔 채,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눈을 감으니 방 안의 어둠이 더 깊어졌다.
다시 잠이 들 수 있을까 생각하며 천천히 숨을 고르다, 어느새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주변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한가운데에는 아까 봤던 시계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시곗바늘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시계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시간을 표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계가 꿈속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잡는 느낌이 들어 온몸이 굳었다. 나는 놀라서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은 여전히 회색빛으로 가득했고, 고요함만이 흐르고 있었다.

다시 시계를 바라보니, 시곗바늘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쫓기듯 시곗바늘이 빠르게 돌아가자, 내 심장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나는 멈춰진 공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누군가 여기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어깨를 잡은 그 손의 감촉은 여전히 생생했다. 공기는 점점 더 무겁고 차가워졌다. 나는 숨을 고르며, 이 상황이 꿈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려 했지만, 모든 것이 너무도 현실처럼 느껴졌다.

순간 주변이 어지러워지며 눈앞의 풍경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내 모든 것이 멈췄다. 나는 낯선 공간에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방 한구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 곳에는 내가 있었다.

미래의 나는 내가 이곳에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피곤한 얼굴에 무기력함이 가득했고, 그 눈빛은 지친 나날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왔네.” 미래의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지친 기운이 묻어났다.

“여긴 어디야?”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물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미래의 나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어갔다.

“선택지가 있어. 네가 원하는 과거로 돌아가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의 나와 시간을 바꿀 수도 있어.”


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두 선택 모두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삶이 너무 길고 지친 나에게 걸맞은 선택지들이었다. 나는 그제야 왜 미래의 내가 이런 제안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래의 나는 내 표정을 읽은 듯 조용히 덧붙였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지금까지 네가 겪었던 모든 것을 다시 겪을 수도 있어. 바꿀 수 있는 건 너의 선택뿐이야. 그리고 나와 시간을 바꾼다면, 이대로 네가 내 자리를 이어받게 되겠지.”


나는 미래의 나를 바라보며 결심한 듯 말했다.


“나를 내가 가장 후회하고 있는 시간대로 보내줘.”


미래의 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계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시곗바늘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곗바늘은 점점 속도를 내며 돌아갔고, 나는 어지러움과 함께 시간이 거꾸로 흘러감을 느꼈다. 눈앞의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고, 이내 점점 익숙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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